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넓이와 깊이

13.07.07



1983년 10월 28일의 일이다. 집을 나선 지 3주일이 지나 있었다.

탑승수속을 할 때, 사소한 일로 누이와 다투고 말았다. 누이로서는 모처럼의 여행인데 뒷맛이 개운찮게 되었다.

괴로운 생각이 문득 문득 치밀었다.

그때 내 머리 속을 무겁게 채우고 있는 것은 '생활'이라는 문제였다.

누이는 비행기를 갈아타야 하기 때문에 내일은 싱가포르에서 1박하고, 그 다음날에는 교또에 돌아간다. 다시 '생활'이 시작되는 것이다.

나는 혼자서 이런 비일상적인 방황을 계속하려 하고 있다. 왜? 무엇 때문에? 거기에 대답할 수가 없다.

생각하면, 나는 흡사 '엉거주춤이라는 독약'에 마비된 양, 이 10년 넘는 세월을 어영부영하며 살아버렸다. 하지만 이제 그것도 끝장을 내야 할 때다. 양친은 이미 가셨고, 나의 젊은 날도 끝나려 한다. 이 여행에서 돌아가면, 확실한 '생활'을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건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생활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마침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하는 비행기를 곁눈질하며, 나는 그런 생각에 시달리고 있었다.


서경식, <나의 서양미술 순례> 중 '거친 하늘과 밭'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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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여행을 나서면서 챙겼던 책 중 제일 꺼려지는 책을 들었다. 선물로 받은 빛바랜 책. 제목도 그렇고 표지 디자인도 그렇고 오늘 같은 날이 아니었더라면 들춰보지도 않았을. 오늘같은 날이란, 여행지 숙소 체크인 시간보다 두 시간 일찍 도착해버린 날. 그리고 바람도 좋고 카페에서 흘러나오는 음악 선곡도 좋고 책 몇 페이지를 훑다가 멍하니 앉아있기 좋은 날. 그런데.. 첫 문장 "그 해 여름은 유난히 더웠다."를 훑기가 무섭게 단숨에 끝까지 읽어버렸다. 작가가 지금 나와 비슷한 나이에 쓴 이 글들은 지금 내 고민과 많은 부분이 겹쳐있었고, 그의 오래된 아픔(하도 오래돼 그도 미처 느끼지 못할만큼 이미 굳은 살이 돼버린 것까지)이 그가 소개하는 그림, 조각 작품들과 절묘하게 어우러져 더욱 깊고 아릿하게 다가온다. '엉거주춤이라는 독약'에 비틀거리는 요즘, 이 책과 함께 '생활'이란 것이 내게 주는 끊임없는 괴로움에 투정도 해보고, 위로도 받아볼 참이다. 내가 지금까지 읽어본 것 중 최고의 여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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