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핀란드 안무가 알포 알토코스키, DEEP ⓒ신동아
-<오직 두 사람>, 김영하
아무와도 대화할 수 없는 언어가 모국어인 사람의 고독.
'아빠'와 화자인 '나(현주)'는 전 세계에서 모국어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유일한 생존자. 서로가 온전히 자신을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 하나의 세계. 답답하지만 서로에게서 벗어날 수 없는 존재.
아빠와 다니던 식당에 비하면 남자와 가게 되는 곳은 늘 수준 미달이었어요.
'나'에게 '아빠'가 아닌 존재'들'은 모두 시시하고 한심하게 느껴진다. 첫 '썸남'과 헤어지고 '나'는 한동안 몸이 아팠다. 이는 실연의 아픔 때문이라기 보다는 '아빠'가 아닌 세계로의 진입 시도에 실패한 데 따른 좌절감 또는 (아빠에게서 벗어나려는 시도를 했다는 것에)대한 죄책감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더 가까울 듯하다. 대학 입시 후 '아빠'와 단둘이 떠난 여행에서 우연히 만난 젊은 배낭여행객들의 여행 방식에 호기심을 갖자 '아빠'는 우회적으로 불쾌함을 표현한다. '나'는 그때도 역시 '아빠'에게 죄책감을 느껴 용서를 구한다.
한 번도 살아보지 않은 삶이 저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요. 그런데 그게 막 그렇게 두렵지는 않아요. 그냥 좀 허전하고 쓸쓸할 것 같은 예감이에요. 희귀 언어의 마지막 사용자가 된 탓이겠죠.
갇혀 있던 세계에서 이제서야 탈출.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곳으로 떠나는 여행. 외롭겠지만 낯섦과 새로움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설렘. 자유와 외로움은 언제나 단짝.
------------------------------------------------------------------
1.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나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상대방이 존재하는 것과 나를 이해할 수 있는 이의 부존재 중 무엇이 더 고독한 것일까. 벗어나고 싶지만 절대 벗어나지 못하는 세계에 갇힌 괴로움, 혹은 이 세계에 나 혼자라는 외로움. 이 둘 중 무엇이 더 고통스러운 것인가.
2. 난 아빠와 사이가 좋은 편은 아니다. 아니 살가운 편이 아니라고 표현하는 것이 맞겠다. 아빠 같은 사람들을 혐오한다. 사람들과 처음 만나자 마자 자신의 직업을 떠벌이고, 식당 종업원에게 하대하고. 사람들을 쉽게 평가하고 지적하고. 식탐이 많아 음식을 대할 땐 교양이라곤 눈 씻고 찾아봐도 없고.
절대 그와 같은 사람이 되면 안 되겠다고 수십, 수백 번을 다짐하고 있다. 하지만 어느새 난 다른 사람들을 평가하고 지적하고 있다. 그것도 난 객관적인 사람이라 자평하면서. 내 예전 직업들, 은행원, 공무원 등등을 그것도 잘 포장해서 떠벌이고 다닌다. 외국계 은행 서울 본점에서 영어로 업무를 보았다거나, 서울시청에서 전문성이 필요한 과업을 맡았다는 둥.
나는 어느새 내가 혐오하던 이를 닮아가고 있었다. 아빠를 보면서 본인 자체로는 남에게 당당하지 못하니 부연 설명을 항상 하고 다닌다고 생각했다. 지금 내가 딱 그런 꼴이다.
3. 나의 결핍은 무엇인가. 나의 결핍을 온전히 이해하고 감싸주겠다고 나서는 이보다는 나의 결핍이 대수롭지 않다며 나를 안심시켜 줄 수 있는 이가 필요하다.
'넓이와 깊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덩어리와 부스러기 (0) | 2016.03.10 |
|---|---|
| 타협 없는 정의 (0) | 2016.02.08 |
| 형체가 아직 남아있기 전에 (0) | 2016.02.01 |
| 존재 만으로 면제된 의무 (0) | 2016.01.17 |
| 중심과 주변이 존재하지 않는 곳 (0) | 2016.01.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