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사회주의와 같이 무시무시한 부패 권력을 행사하는 지옥 같은 체제로부터 자기 자신을 방어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이러한 체제는 자신의 희생자들을 타락시키고 그들을 자신과 비슷하게 만든다. 크고 작은 공범들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이 체제에 저항하기 위해서는 매우 단단한 도덕적 뼈대가 필요하다. 자신의 전(全) 세대와 마찬가지로 유태인 장사꾼 하임 룸코프스키의 도덕적 뼈대는 약했다. (...) 그의 이야기는 라거의 관리자들과 카포들에 대한 매우 유감스럽고 우려스러운 이야기다. 한 체제를 위해 일하고 그 체제의 죄에는 자진해서 눈감아버리는 하위 권력층들의 이야기다. (...) 그의 광기는 셰익스피어의 <법에는 법으로(Measure for measure)>에서 이사벨라가 묘사하고 있는 교만하고 치명적인 인간의 광기이다. 인간은,
(...) 일시적인 권력의 옷을 걸치고,
철석같이 믿어 의심치 않는 자신의 본질이
사실은 유리처럼 부서지기 쉬운 것임을 모른 채
성난 원숭이처럼
하늘 아래 온갖 바보 같은 광대짓을 해서
천사들을 울린다
룸코프스키처럼, 우리 역시 권력과 위신에 현혹되어 우리의 본질적인 나약함을 잊어버린다. 우리 모두 게토 안에 있다는 것을, 게토 주위엔 담벼락이 둘려져 있고, 그 밖에는 죽음의 주인들이 있으며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죽음의) 기차가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잊어버린다. 그렇게 우리는 자발적이든 아니든 간에 권력과 타협하게 되는 것이다.
-프리모 레비,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중에서-
1940년대 유태인 집단 수용소든, 현재 한국 사회든 권력이 존재하는 그 어느 조직이든 사회 구성원은 권력자, 체제에 순응하는 자(하위 권력층), 체제에 저항하는 자, 체제에 희생되는 대중으로 나뉜다. 힘든 상황으로 치닫을수록 (몇몇 권력자를 제외한) 사회 구성원들은 우리가 게토 안에 있다는 것을 잊기 쉽다. 결국 이 비정삭적인 체제의 과실을 가져가는 집단은 권력자뿐이다. 체제에 순응하는 자들은 당분간은 그 과실을 나눠가지고 권력자 부류에 포함된 듯한 기분을 누릴 수도 있지만 곧 저항자들과 함께 죽음의 기차에 올라타야 하는 순간이 온다. (저항자와 차이점이 있다면 기차에 오르는 시점이 아주 조금 늦춰진다는 것이다) 체제에 순응하는 하위 권력층은 권력자들에겐 이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이용되는 수단일뿐이다. 필요할 땐 구슬려 이용하고, 쓸모가 없어질 땐 언제나 다른 수단으로 교체해버리는. 언론이 대표적인 하위 권력층일 것이다.
먹고 살기가 힘든 때, 도덕이나 정의는 배부른 소리라며, 민생이 먼저라고 말하는 사람들. 힘들수록 우리가 무너지지 않는 일은 연대를 통해 권력에 맞서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도덕적 뼈대를 단단히 만들어줄 누군가가 필요하다. 어차피 권력자들이 말하는 민생에는 '민'이 없기 마련이다. 그것이야말로 대중을 분열시키기 위한 '악마의 속삭임'이다. 국민을 대표하겠다는 정당 대부분이 정의를 말하고 있다. 그중에서는 민생을 위해 권력자들과 약간의 타협을 하겠다는 집단도 있고, 권력층과 일말의 타협도 없을 것이라는 집단도 있다. 타협을 해서라도 민생을 좀 더 나아지게 하겠다는 논리를 과연 합리적이라고 평가할 수 있는지 의문이다. 일단 권력과 타협을 하는 순간, '민'은 사라진다. 약자들을 위한 나라는 권력과 타협하지 않는 정의가 실현되는 나라다. 나약한 우리가 죽음의 기차에 올라타지 않기 위해 할 수 있는 유일한 길, '연대'는 타협하지 않는 정의를 외치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이뤄져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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