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넓이와 깊이

덩어리와 부스러기



지금 현재 그가 삽질을 하고 있네. 사실은 그 사람이 삽질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닐세. 그 때에 절은 모자가 하고 있는 걸세.

얼마나 위로해야 할 나의 전체의 일부냐!

얼마나 불쌍한 현실의 패자냐!

얼마나 몸서리치는 사회의 한 색깔이냐!

그렇다! 저주받아야 할 불합리한 현실이 쓰다 버린 쪽박이다! 쪽박을 쓰기 시작해쓰면 끝까지 부서지지 않게 잘 쓰든지 아니면 아예 쓰지를 말든지,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아니고 그저 무자비하게 사회는 자기 하나를 위해 이 어질고 착한, 반항하지 못하는, 마도로스 모자를 쓴 한 인간을, 아니 저희들의 전체의 일부를 메마른 길바닥 위에다 아무렇게나 내던져버렸다. 

이 가엾은 인간은 처음 얼마간은 뜨거운 길바닥에서 정신을 못 차린 채로 얼마를 지내고, 또 정신을 차리고 얼마간의 시간을 보내고, 또 의지와 자존심으로 얼마를 보내고, 마침내 금이 간 쪽박은 뜨거운 열기에 물기가 증발되어 말라 비틀어져서 두 쪽이 났네.

그 중 한쪽은 자진해서 쓰레기통에 기어들어가 눈을 감고 죽어버렸네. 또 한쪽, 떨어져나간 한 쪽은 어떻게든지 다시 물기를 빨아들여 비틀어졌던 육체를 다시 펴고 어떡해서든 그 전체 속에 다시 뭉쳐보기를 희망하는 것일 거야. 

그런데 내 앞에 선 이 반쪽ㅇ느 희망하는 것이 아니라 떨어져나간 반쪽을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애. 지난날 그 많은 양의 물을 삼키던 그 반쪽을 말일세. 나도 예외는 아닐세. 그렇지만 나는 그 속에 뭉치지를 않고, 그 뭉친 덩어리를 전부 분해해버리겠네.

오늘 나는 여기서 내일 하루를 구하고 내일 하루는 그 분해하는 방법을 연구할 것일세. 방법이랑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특히 나는 그 덩어리가 자진해서 풀어지도록 그들의 호흡기관 입구에서 향을 피울걸세. 한 번 냄새를 맡고부터는 영원히 뭉칠 생각을 아니하는 그런 아름다운 색깔의 향을 말일세. 그렇게 되면 사회는 덩어리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또한 부스러기란 말이 존재하지 않을 걸세. 

어떤가? 서로가 다 용해되어 있는 상태는 멋있겠지?

-<전태일 평전> 원섭에게 보내는 편지 중에서, 조영래-


마치 한 편의 시와 같다. 부스러기가 아닌 개인. 거대한 조직의 부속이 아닌 독립된 개체. 전태일은 개인이 권력을 떠받치는 일부가 아닌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인간이 되길 열망했다. 그는 불합리한 덩어리(시스템)보다 불합리성을 깨닫지 못하고 착취만 당하는 부스러기(노동자)의 변화가 더 중요한 문제라고 여겼던 것 같다. 뭉친 덩어리를 분해하는 부스러기들이 많아질 수록 사회는 더욱더 빠른 속도로 용해될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