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를 거치지 않고 똥구멍에서 입으로 바로 나오는 유창한 말, 지성인으로서의 고뇌가 없는 말, 이것이 능변이다. 자신뿐만 아니라 세상의 모든 사태에는 그들만의 고유한 굴곡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포착하지 못하는 시는 매끄러운 빙판을 미끄러져 나가듯 유연할 것이다. 그러나 미끈미끈한 것, 이것은 관념이나 감상에서만 가능할 뿐 삶에서는 불가능하다.
-강신주, 김수영을 위하여 중 발췌-
매번 작문시간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두 편의 글의 주인은 바뀌지 않는다. 효정이 글과 경이 글이다. 그 두 친구의 글은 항상 지적이다. 글이 담고 있는 아이디어도 훌륭하고 레토릭도 세련된 편이다. 유머까지 느껴진다. 진부하지 않고 촌스럽지 않다. 그런 그 둘의 글은 비슷하면서도 전혀 다르다. 굳이 차이점을 얘기하자면, 경이 글은 자유롭고 부드러운 유영을 하는 느낌. 효정이 글은 읽는 리듬감이 있지만 이상하게 다 읽고나면 불편한 느낌이 남는다. 오늘 강신주의 글을 읽어보니 답이 여기에 있었다. 경의 글은 아름답고 편하긴 하지만 고뇌가 없고, 효정이 글에는 내(혹은 수많은 독자들의)마음을 불편하게 할 만큼 그녀의 깊은 고뇌가 있었다. 그녀는 미끈미끈한 것에 대해선 절대 쓰지 않는다. 삶은 사물이나 사건, 혹은 타인과 부딪히면서 이루어진다니까. 그래서 삶에서는 항상 무엇인가 저항이 발생할 수밖에 없는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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