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계획
그리고 지혜의 충고가 바깥 생활의 웅성거림 때문에 더이상 지워져버리지 않는 그런 시간에, 홀로 집에 돌아오면서 그는 생각했다. '나는 오늘 몽상 속에서 세 개의 주거를 가져봤고, 어느 집에서나 똑같은 즐거움을 발견했다. 나 혼이 이렇게 날렵하게 여행을 하는데, 무엇 때문에 내 몸을 다그쳐 장소를 바꾸게 하겠는가? 또한 계획 그 자체에 벌써 충분한 향락이 있는데, 계획을 꼭 실천해서 좋을 게 무언가?'
-샤를 피에르 보들레르, '파리의 우울' 중에서-
확실히 계획에 따라 행동을 하는 데엔 묘한 쾌락이 있다. 일정표에 구속된 느낌에 안정감을 느끼기도 하고 시간에 맞춰 모든 일정을 처리했을 땐 작은 성취감마저 느껴진다. (사실 난 그 계획을 무참히 어기는데서 오는 근거 없는 정복감? 일탈감? 에서 더 큰 쾌락을 느낀다)
오늘은 이런 종류의 쾌락말고 상상만으로 얻을 수 있은 쾌락과 오감으로 느껴야만 얻을 수 있는 경험적 쾌락에 대해 생각한다.
상상쾌락은 말 그대로 내가 뭘 상상하든 그 정도의 쾌락은 보증된다. 하지만 딱 상상까지만... 상상력이 부족하거나 경험해보지 못한 종류에 대해 상상을 하게 되면 어떤 느낌인지 감조차 잡지 못한다는 부작용이 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충족됐을 때 상상에는 한계가 없으므로 한계없는 쾌락을 만끽할 수 있다. 단, 육체는 쾌락으로부터 소외된다.
오감쾌락(경험쾌락)은 내 몸이 즐겁고 이는 내 정신으로까지 연결돼 심신 모두를 즐겁게 한다. (이는 나중에 상상쾌락의 재료로 쓸 좋은 소스가 되기도 한다.) 오감쾌락에도 한계가 있다. 다들 알다시피, 뭘 경험하든 기대 이상의 만족을 얻는 경우는 정말 드물다. 대부분은 기대에 못미치는 즐거움을 준다. 그래서 경험한다고 해서 내가 기대했던 쾌락으로 이어진다는 보증을 아무도 서주지 않는다. 게다가 계획과 어긋남에 따라 발생하는 고됨은 보너스다. 친구나 연인이 여행 가서 꼭 싸우는 이유, 연인이 가장 자주 싸우는 날이 크리스마스 연휴인 이유들이 이를 설명한다. 하지만 내 입장에선 계획과 어긋나는 순간 나의 은밀한 쾌락은 시작된다. 이상하게도 예상치 못했던 고생을 하는 데서 얻어지는 쾌락은 나를 아주 즐겁게 하며 이는 내가 자주 오랫동안 여행을 하고 싶은 이유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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