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넓이와 깊이

31세 싱글 여성이라는 가면



힐러리 클린턴의 여성 리더십에 관한 연설 중에서 여성 지도자의 가장 중요한 자질은 "감사하는 능력"이라는 내용이 있다. (...) 우리 사회에서 서른다섯 살이 넘은 여성이 공적 영역에서 건강하게 보람을 느끼고 자아 존중감을 지키면서 일하기(버티기)란 쉽지 않다. (...)여성의 피해를 논하는 것이 아니라 조건이 열악한 사람은 누구나 타인과 사회에 고마운 마음을 지니기 어렵다는 이야기다. 이 모든 어려움을 돌파하는 데 여성주의 인식만큼 중요한 것이 감사하는 마음이다. 내 처지가 어떻든 간에, '지금, 여기의 나'는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과 양보의 결과다. 이것이 세상의 원리다. 

감사는 예절이나 긍정적 태도, 마인드 컨트롤이 아니라 세상에 대한 접근 방식이다. 비판 의식은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 대한 애정과 감사, 겸손한 마음에서 출발해야만 가능한 것이다. 

-정희진, 페미니즘의 도전(p.18)


4년 전 일이다. 당시 나는 친구의 일을 도와주기 위해 지방에서 20명 가량의 스탭이 모여 무언가를 만드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었다. 난 관련 경험이 전무해 말단 시다바리 역할을 했다. 전 달에 은행을 퇴사한 후 한 달간 여행을 계획하고 있었는데 좋은 기회라 생각했다. 친구의 일을 도와주면서, 여러 지방을 돌아다녀야 하는 프로젝트 특성상 가보지 못한 남해를 마음껏 돌아다닐 수 있었고, 무엇보다 완전히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됐다는 데 들떠 있었다. 하지만 거기서 내 감사의 표시가 문제가 될 줄은 상상도 못했다. 어떤 이는 내 감사의 인사를 보고 '웃음이 헤프다'라고 했으며, 어떤 이는 내 감사의 인사를 보고 '흘리고 다닌다'고 했으며, 어떤 이는 '예전 은행에서 일하던 티를 못벗어 가식적인 모습이 아직 남아있다'고 했다. 물론 누군가는 '착하다'라고 했다. 그들에게 난 언제나 웃는 가면을 쓴 일행이었다. 난 단지 내가 완전 초짜로 일하는 내가 그곳에서 사람들과 어울려 지내는 게 감사할 따름이었다. 크고 작은 사고로 일정에 차질이 생기고, 친구와 다른 사람들 간의 언성이 높은 일도 잦아지고. 그 모든 일에서 내게 모든 책임을 덮어씌우지 않아 감사했고, 나를 다른 경력직원들과 동등하게 대해준 게 감사했다. 내가 그런 '마초'적인 현장에서 감사를 느꼈다는 것은 필시 많은 사람들의 배려와 양보가 있었던 결과다. 그래서 난 감사의 인사를 했다. 하지만 프로젝트가 끝난 후, 난 웃음이 헤픈 애였으며, 누군가에겐 흘리고 다닌 애였으며, 누군가에겐 가식적인 은행직원이었으며 , 누군가에겐 그냥 착한 애였다. 내 감사는 그 누구에게도 닿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썼던 가면은, 아니 그들이 내게 씌운 가면은 31세의 싱글인 여성일지도 모른다. 그 가면으로 내 감사가 그들에게 잘 보이지 않았고, 가닿지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이 요상한 가면은 당시 꽤 친했던 사람들과 나 사이 역시 벌어지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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